[fiction] 카푸치노, 보쌈, 캘리포니아 롤 by 베리배드씽

 아침에 누군가와 이별해 본 적이 있는가. 난 그 이전에 점심 때도, 저녁 때도, 늦은 밤, 새벽에도 헤어져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침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건 '햇빛 눈이 부신 날에 이별해봤니 비오는 날 보다 더 심해. 작은 표정까지 숨길 수가 없잖아' 와 비슷하다. 아침부터 기분 잡쳤다는 얘기다. 
 희란이가 집을 나갔다. '내 집'을 떠나 '자기 집'으로 갔으니 집을 나갔다고 하는 건 좀 이상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희란이는 내가 잠든 사이에, 옷 갈아입으러 가기 귀찮은데 뭐하러 왔다갔다하냐며 희란을 붙잡았던 날 이후로 시작된 공동생활에 저 혼자 마침표를 찍어버렸다. 매트리스 옆에는 연습장을 북 찢어 그린 연필 스케치가 놓여 있었다. 자고 있는 내 뒷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림 아래쪽 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오빠 옆모습을 보면 눈물이 날 것 같았어요. 오빠에게 나는 뭘까 그런 생각 때문에 힘들어도, 이상하게 오빠 옆모습을 보면 불쌍해 보이고 하염없이 그 얼굴만 보고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옆모습을 그리면 마음 약해질까 봐 오빠의 벌거벗은 뒷모습을 그렸어요. 그런데 오빠 등에 칼을 꽂고 싶어져요. 미치겠어요. 그러니까 저에게 다시 연락하지 말아요.

 난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하고 면도를 했다. 슬프다기보다는 무서웠다. 카푸치노를 마시고 싶었다. 희란이는 카푸치노를 좋아했다. 문득 카푸치노를 그렇게 오래 마시다 보면 사람이 그렇게 이상해질 수도 있는지 궁금했다. 적어도 울어서 눈이 퉁퉁 부은 상태로 점심에 누군가를 만나는 곤란만은 면해야 했다.
 스타벅스에서 카푸치노를 마셨다. 컵을 드는 순간부터 돈이 아까웠고 마실수록 위벽을 깎아대는 듯 속이 쓰렸다. 그러나 위라도 채우지 않으면 금새 희란의 생각으로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영주 누나는 사흘 뒤에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떠난다. 일년 간은 얼굴 보기 힘을 것이다. 영주 누나는 나를 좋아했다. 술을 마시면 내 볼에 뽀뽀를 하며 희란에게 걸려오는 전화에 신경질을 내기도 했다. 문제는 영주 누나가 좋아하는 남자가 나만이 아니었다는 것, 그리고 희란이 영주 누나의 존재를 오래 전부터 잘 알았다는 거다. 
 영주 누나는 보쌈을 먹자고 했다. 어차피 누나가 사기로 했기 때문에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누나는 연신 맛있다고 했지만 난 젓가락이 영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몇 점 먹지 않았는데 목이 말라서 물만 연신 들이켰다. 누나는 내가 아파보인다고 걱정해 주었다. 누나는 보쌈을 참 먹음직스럽게 먹었다. 주변의 손님들도 다들 왁자지껄 맛있게 먹었다. 그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으니 내가 이상한 사람 같았다. 누나가 무척 아쉬워했지만, 난 속이 좋지 않다고 거짓말을 하고 급히 집으로 향했다. 누나, 캐나다 가서 다른 남자랑 바람나면 안 돼요~^^
 머리가 아프고 미열이 났다. 그러나 집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정말 졸려서 쓰러져 잠들 시간이 될 때까지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무작정 강남역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금요일 오후였다.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들이 무슨 잘못이겠는가. 애인에게 차인 주제에, 내가 바보다. 무작정 강남 교보문고까지 천천히 걸었다. 
 교보문고에서 두 시간 정도 책을 읽었다. 사실 무엇을 읽어도 집중이 되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강남 교보에는 책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마지막에 잡은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가장 오래 읽었다. 하루키는 <상실의 시대>에서 한 인물의 입을 빌어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이상 읽은 사람은 나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위대한 개츠비>는 전에도 한 번 읽다가 거의 던진적이 있다. 그러나 그 때는 기꺼이 하루키의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희란은 <상실의 시대>를 읽으니 비를 맞아 더러워진 개가 떠올랐는데, 그래서 이 책이 좋다고 했었다. 그녀가 <위대한 개츠비>를 읽으면 뭐라고 할 지가 너무 궁금해졌다.
 그 때 옆에서 다른 출판사의 <위대한 개츠비>를 읽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왠지 금요일 오후에 사람들로 북적이는 강남역 한구석에서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있다는 것이 굉장한 인연처럼 느껴졌다. 헌팅은 고등학교 때 야외로 소풍가거나 친구들끼리 놀러갔을 때 이외에는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때는 누군가에게 간절히 말을 걸어보고 싶었다. 
 박지영은 DVD를 보러 가자고 했다. 극장에서 딱히 보고 싶은 영화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내가 이러이러한 영화가 요즘 재밌다고 하나하나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다 퇴짜를 놓았다. 박지영은 <다세포 소녀>를 보고 싶어했다. 
 "그거 진짜 이상하고 재미없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보고 싶어요."

 단단히 잘못 걸렸구나 싶었다. 그러나 난 그 때 거의 자포자기 상태였다. 점심 때의 미열과 두통에는 이제 메슥거림까지 동반되어 뭔가를 깊이 생각하기가 점점 귀찮아졌다. 여자와 DVD방에 와서 영화만 보고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영화는 한 마디로 야하면서도 안쓰러웠다. 박지영은 <다세포 소녀>가 김옥빈을 다루는 과정에서는 경제적 계급의 불공평함을 세심하게 다루고 있으면서도, 복장 도착자인 이원종을 다루는 과정에서는 오히려 성적 소수자를 희화화함으로써 성적 계급의 역학관계에는 소홀했다고 신나게 떠들어댔다. 나는 메슥거림을 참고 최선의 매너를 다해서 물어보았다. 
 "햄버거라도 먹을래요?"
 "햄버거 말고요. 캘리포니아 롤 좋아하세요? 이 근처에 맛있는 데 알아요."

박지영은 메뉴를 시키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그건 희란보다 나은 점이었다. 나에게 질문도 많이 하고 말도 많이 하는 박지영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박지영이라는 이름이요, 흔하면서도 예뻐요. 성과 이름도 잘 어울리고요." 
 "그래요? 그런 말 처음 들어요."
그녀는 호탕하게 웃었다. 박지영은 입이 짧으면서도 메뉴를 세 개나 주문했다. 난 메뉴명도 기억나지 않는 캘리포니아 롤을 계속해서 집어먹었다. 
 
 그 뒤로 삼일 동안 집 밖을 나가지 못했다. 물 한모금도 게워낼 만큼 심하게 체했다. 나중에 거의 기어서 간 병원에서는 이 정도면 응급실에 실려갈 수도 있을 상태였다고 말해주었다. 이러다 죽고 말겠다고 생각한 게 엄살은 아니었던 거다. 병원을 다니고 편의점에서 산 참치죽이라도 전자레인지에 돌려먹을 수 있을 정도로 정신을 차리게 되자, 급체의 원인이 무엇인지 꼭 알아내고 싶어졌다. 인터넷으로 검색한 체증의 원인은 너무 많았다. 춥거나 긴장된 상태에서 급하게 먹으면 체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난 그날 카푸치노와 보쌈과 캘리포니아 롤을 먹었다. 사실은 영주 누나에게 전화해서 그날 보쌈 먹고 괜찮았냐고 묻고 싶었고, 박지영에게 그 날 캘리포니아 롤 먹고 괜찮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캐나다에 있는, 그리고 나를 좋아하는 영주 누나에게 그런 일로 메일을 보내기에는 너무 민망했고 그렇다고 박지영을 다시 만날 빌미는 조금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희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침에 희란을 생각하며 카푸치노를 마실 때부터 몸의 컨디션은 점점 나빠졌었다. 그녀는 내 등에 칼을 꽂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난 급체로 거의 숨이 끊어질듯한 지옥을 경험했다. 문제의 원인은 분명히 따져야 했다.
  " 전화할 줄 몰랐는데."
  "너 때문에 많이 아팠어. 네 생각 하면서 아침부터 카푸치노 마시고 체해서 삼일 동안 죽는 줄 알았다."
  "솔직히 오빠도 지금 말하면서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지? 그게 왜 내 잘못이야?"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나 희란의 목소리를 좀 더 듣고 싶었다. 난 삼일 동안 방안에서 꼼짝도 못하고 거의 쓰러져 있었는데, 나중에 병원에서는 응급실에 갔었어야 할 상황으로 진단했다고 말했다. 조금 있다가 희란이 입을 열었다.
   
  지금은 좀 어때? 그 때 전화하지 그랬어.

덧글

  • ifury 2008/11/05 14:22 # 답글

    앗, 희란이다~~
    '나',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쟁이구나, 자기자신도 속이려고 아둥바둥하는.. ^^
  • 베리배드씽 2008/11/05 23:24 #

    자기도 인정하기 싫었겠지. 그리고 원인 모를 급체에 지독하게 시달렸으니 막무가내로 누군가에게 원인을 전가하고 싶은 심정이었을 거야. 난 '나'가 솔직하지 못해서 치졸한 사람으로 보이기를 원했어.
  • 2008/11/06 21:0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베리배드씽 2008/11/06 23:46 #

    마지막 말은 사실 뉘앙스가 양가적이라고 느꼈어요. 쓸 때는 사실 어느 정도 희망의 여지를 남기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그 때 전화하지 그랬어. (지금은 너무 늦었다)' 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나'의 상태를 염려하는 '지금은 좀 어때?'가 뒤에 갔으면 희망 쪽에 좀 더 무게가 실렸겠죠.
    전부터 비공개님은 인격자라고 생각했었어요 ^^ 그런 아픔들을 극복하고 친구가 되셨다니... 사실 저 이야기에서 희란에게 전화를 건 '나'는 어느 정도의 희망을 품고 전화를 한 걸로 보여요. 그 이후에 둘이 어떻게 됐을지 잘 모르겠어요. 원하는 결말은 아니지만 둘이 충분히 화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네가 약해질 때만 내 것 같아'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꽤 있어서요. (은희경의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에 나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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