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운론 과제, 100분토론, mail by 베리배드씽

 토론 드러가개씀니다. 국쩡조사는 일딴 내달 시빌부터 이심뉴길 똥안 열림니다.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 발표를 보니까 사회지도층 인사명단부터 우선 공개하되 보니니 워날 꼉우애 소명 자료를 부치도록 해따, 이러캐 발표를 핸는대 문재는 사회지도층 개녀미 어떠캐 되는 거시냐, 그러니까 버뮈가 무어시냐 하는 문재가 남는대요. 장윤석 의원깨서는 어떠캐 판단하고 개심니까?

 희란이 타이핑해서 출력해 놓은 A4용지는 이런 내용으로 시작되었다. 이는 2008년 10월 23일자 MBC <100분 토론>의 대본을 소리나는 대로 다시 써놓은 것이었다. 희란이 수강하는 국어학 수업 '음운론'의 과제라고 했다. <100분 토론>처럼 언술이 오래 오가는 프로그램에서 20여분의 분량을 따서 그 발음대로 적어서 제출해야 했다. 
 "너넨 왜 이렇게 이상한 과제만 시켜? 맞춤법 모르는 유딩이냐? 이걸 말한 손석희가 다 바보같다."
 희란은 이 원고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눈동자만 움직이는 묵독이 아니라, 혀를 움직여 소리내어 읽어보는 통독의 과정이 필요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과정이 나에게도 필요하다고 했다. 요즘 들어서 희란은 말이 없어졌지만, 말을 하면 늘 이상한 말만 골라서 했다. 얼마 전에는 하루에 두 번 전화 통화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심야에 다섯 시간씩 통화하던 건 일 년 전의 일이다. 사실 담배를 피우러 도서관 커피자판기 쪽을 갈 때 빼고는 굳이 전화를 해야 할 필요성을 몰랐고, 수업 시간이 지루할 때 보내는 그 많은 문자로도 충분히 할 말을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난 희란이 알아주기를 원했고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뭐 먹고 싶은 거 없냐고 물었다.
 희란의 과제는 생각보다 꽤 많은 시간을 요하는 작업이었다. 그 애 집의 컴퓨터가 고장나서 우리 집에서 숙제를 하겠다고 온 건데 벌써 두 시간이 지났다. 방송사 홈페이지에 누군가 올려 놓은 대본에는, 희란의 바보같은 과제가 무안해질 만큼 토론의 내용이 토씨 하나도 거의 틀리지 않게 올바른 맞춤법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희란은 100분토론의 다시보기와 대본을 참조하면서도, 문장들을 소리나는 대로 적는 일에 애를 먹었다. 옆에서 지켜본 나도 이 과제를 정말 바보같게 만드는 것은 과제를 완성하는 데 들어가는 어처구니없는 시간과 노력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희란은 무심결에 자꾸 토론의 내용을 맞춤법에 맞게 타이핑했다가 다시 수정하곤 했다. 희란이 컴퓨터를 쓰느라 내가 심씨티를 못하는 문제만 아니었더라면 그애가 좀 불쌍해 보일 뻔했다. 초중고를 거치며 학습된 맞춤법은 매번 희란으로부터 '되어'의 줄임말이 '돼'니까 제발 헷갈리지 말라는 타박을 들어왔다지만 그래도 꽤 뿌리깊은 것이었나 보다. 나도 시험삼아 세 문장을 옮겨적다가 두 손을 들었으니 말이다. 다만 장윤석 한나라당 의원이 '의혹'을 '으혹'이라고 발음하고, 문장 중간중간에 '스읍'하는 소리를 내는 걸로 봐서 경상도 출신의 중년 남성이라는 짐작은 가능했다. 
 그런데 희란은 이 과제가 점점 좋아진다고 했다. '국정교과서로 학습된 문법'이라는 관습을 깨부수는 느낌이고, 중고등학교 때 반 전체 아이들을 대상으로 교과서를 통독할 때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기록의 과정은 그 내용파악을 거의 완벽하게 방해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발언의 내용은 문장으로, 단어로, 음절로, 음운으로 쪼개져, 자신은 이 토론의 내용이 '쌀 직불금 논란'임에도 불구하고 손석희 진행자의 명료한 발음과 민주당 의원의 서울말씨, 그리고 한나라당 국회의원의 경상도 방언밖에는 의식할 수 없다고도 했다. 난 희란에게 배고프다고 말했다. 희란은 컴퓨터를 오래 써서 미안하다며 늘 그랬듯이 치즈 크러스트 피자를 시켜주었다.
 이튿날 희란은 다음과 같은 문자를 보냈다. 

너낸왜이러캐이상한과재만시켜? 마춤뻡모르는유딩이냐? 이걸마란손서키가다바보가따. 한번읽어보면의미는파악될걸. 장난이니화내지마^^과제에너무심취했나봐

 난 멍청하게도 희란의 요구대로 문자를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엄연히 혀를 움직여 한 번 읽어보았다. 기분이 뭐라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이상했다. 화장실의 조악한 음화를 본 기분 같기도 했다. 문장을 읽음으로써 의미는 온전히 파악되지만, 다시 문자를 읽어보니 그 의미가 형체도 없이 완전히 분해되었다. 순간적으로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와 모멸감이 치밀어올랐다. 그러나 장난이니 화내지 말라는데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내가 우스워질까봐, 다음과 같은 답문을 보냈다.

어제장난친거가지고삐졌냐?요즘왜그래?아직할때안됐잖아.그날도아닌데서로좋게좀지내자

 그 뒤로 희란은 이런 문자를 다시 보내지 않았다. 그 대신 내가 하는 말을 들을 때의 표정이 약간 달라졌다. 낯선 외국인이 하는 말을 힘겹게 해석해보려는 표정 같기도 했는데, 문제는 그렇게 골똘하게 고민해서 듣는 사람이 말의 의미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듯 보였다는 데 있다. 그러나 이상한 말을 하는 경우도 급격히 줄었기 때문에, 그리고 왠지 물어보기가 두려워져서 덮어두고 넘겼다. 내가 꼬치꼬치 물어보지만 않으면, 희란은 늘 괜찮은 애로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 전 희란과 심하게 싸우고 며칠 간 연락이 없었다. 나는 늘 그랬듯이 하루 정도 지나면 희란이 아무렇지 않은 척 전화를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방금 희란으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난 그 메일을 소리내어 읽을 수밖에 없었다. 소리내어 읽으며 애써 의미를 맞춰놓으면, 메일에 쓰여진 문자들이 다시 그 의미를 조롱하듯 찢어놓았다. 이번 장난은 서로에게, 꽤 훌륭했다. 정말이다. 난 희란의 뜻에 따를 것이다.

장난친다고 오해하지 안키를 바란다. 그런대 이런 얘기는 이러캐 쓰는 개 오히려 나깨따는 생가기 드러써. 서로 덜 충격쩌긴 방버브로 매씨지를 바다드리기 위해서. 난 어재 쓴 매이를 통도카며 지금 두 번째로 쓰고 이써. 너도 편지를 일끼 위해서는 어떤 부부는 한 번 소리내어 일거봐야 할 꺼야. 그래서 서로, 편지를 일는 동아내는 마으미 덜 아플 꺼라고 생가캐. 난 너를 더 이상 보고십찌 안타. 우리 이재 그마내. 나는 이재 더 이상 네 마를 온저난 의미로 드를 수 업써. 소리나는 대로, 무의미한 음저릐 파편들로 들려. 이건 서로애개 안됀 니리야. 너애개 조은 여자이고 시펀는대. 너는 한 때 조은 남자여써. 고마워.

이야기를 끄적이게 된 힌트는 여기에->곱슬머리, 꿀, 골무 
: 이 분들이 세 가지 소재로 이야기 쓰기를 하고 계신 듯. 읽으면서 오랜만에 즐거웠다.
나도 써볼까 하고 생각나는 대로 썼다. 사실성, 개연성 다 던져놓고 자판을 두드려 놓으니 웃기지도 않다.

덧글

  • 달홍이 2008/11/04 15:42 # 삭제 답글

    오! 재밌는데! 희란의 마지막 메일, 참신하다~ 맨 아래 괄호안에 해석해놓은 부분은 지우는게 더 좋을듯 :)
  • 베리배드씽 2008/11/04 16:07 #

    고맙다. ㅎ_ㅎ 애독자의 요구를 받아들일게~쓰면서 이게뭐야 했는데.ㅜㅜ 난 당신과 캣버트의 이야기 참 재미났어. 후속편 목하 기대중.
  • 2008/11/04 21:22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베리배드씽 2008/11/04 23:17 #

    이 일 자체는 픽션이에요. 제가 상상력이 좋은 편이 아니라서 경험이 섞여 있긴 하지만요. 결국 희란이 음운론 과제를 하던 방식으로 '나'에게 이별을 통보하는 메일을 쓴 거죠. 희란은 '나'로부터 소외감을 느꼈고, 과제를 하듯 이야기를 의미로서가 아니라 소리의 단위로 받아들임으로써 상처를 받지 않으려 해요. 하지만 '읽어야 의미가 통하는' 표기법은 결국 꽤 절망적인 상황을 드러내는 것. 희란이 보낸 메일도 소리내어 읽어보지 않으면 이상해 보이기만 하지만, 읽어보는 성의를 발휘하면 의미가 드러나도록 쓰여져 있어요. 그냥 쓰긴 했는데, 흠을 한 열가지는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요.-_-

  • 하루 2008/11/05 10:52 # 삭제 답글

    마지막 메일이 정말 독특하고도 참신하네요 :)
    분명히 슬픈 내용인데 그냥 보는 동안에는 의미가 해체되어 버리는 그 독특함.
  • 베리배드씽 2008/11/05 13:22 #

    참신하긴 한데, 현실성은 없는 것 같아요. 뭐 세상에 별 사람들이 다 있으니 그렇다고 꼭 단정할 수는 없지만. 여자가 과제를 하며 '소리내어 읽어보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나'에게 말하잖아요. 그런 게 필요하다고 본 거죠. 관습화된 관계에 대해 재고해 보는 과정이요.
  • 달홍이 2008/11/05 22:06 # 삭제

    현실성이 없다라~ 난 그 점 때문에 더욱 요 글이 마음에 들어 ^^ 뭔가 새로운 너를 발견한듯한 느낌? 이 소재로 좀 더 다듬으면 상도 탈 수 있을것 같아! 그만큼 소재도 전개도 일반인은 물론 전문가들에게도 어필할수 있을만큼 훌륭하다는 뜻이야 :)
  • 베리배드씽 2008/11/05 23:35 #

    다듬으면 지금보다 나아지리라는 데는 동감한다 ㅎㅎ 소재 자체는 재밌는데, 이것을 어떻게 좀 더 심도있게 풀어나갈지 고민하다가 그냥 연애담으로 써버렸어. 관념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이야기라서. 여기 저기 뻥뻥 뚫려 있는데 좋게 읽어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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