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은 먼곳에

 혼자 영화를 보고 싶어 찾은 극장에서, 가장 기다릴 필요가 없었던 영화를 보았다. 

 "아, 완전 재미 없어."/ "그러게. 내가 생각했던 거하고 달라, 진짜 슬플 줄 알았는데."
화장실이 시끄럽지만 않다면 그곳은 영화 상영 뒤 날것의 감상평을 공으로 들을 수 있는 곳이 되기도 한다. 그들의 감상평을 종합하면 <님은 먼곳에>는 생각했던 것과 달리 진짜 슬프지 않아서 완전 재미없는 영화다. 그녀들은 내 또래의 20대 여자들이었다. 사실 <님은 먼곳에>는 성별과 세대를 아우르는 영화가 아니라 오히려 그 경계들에 따라 호불호의 경계가 분명해질 영화다. 한마디로 베트남 전쟁을 체험한 세대의 남성들을 '호'의 끝에, 나처럼 전쟁을 모르는 20대 여성들을 '불호'의 끝에 위치짓는 구도다. 이러한 균열은 이준익 감독 영화에서는 드문 여성.원톱 주인공의 성격 때문이다.
 수애는 예뻤다. 감히 말하자면, 의외로 공력을 들인 전쟁씬도 간간이 들어가 있지만 뭐니뭐니해도 영화 보는 즐거움의 팔할은 수애 보는 재미에서 비롯한다. '드레수애'를 만든 일등공신인 곧게 뻗은 쇄골과 잘빠진 어깨라인은 여자인 여자인 내가 봐도 반할 만했다. 그러나 '순이'가 '써니'가 되어 점점 과감한 노출을 감행할수록, 영화 시작에서 은근히 끼를 보여주던 그녀 자신은 나래를 펴는 게 아니라 점점 불투명한 캐릭터가 되어간다. 예고편에 나왔던, 미륵보살반가사유상 혹은 모나리자같은 알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짓는 모습은 이 영화에서의 순이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즉 그녀는 굴욕적인 전쟁에 참전해 청춘을 바쳐야 했던 당시 남성들이 희구했을 여성성의 현현이다.
사랑하지도 않는 남편을 찾아, 시어머니를 대신하여 험한 이역만리길에 오른 순이는 신실한 아내이자 효부의 역할을 가장 극적으로 수행한다. 종종 드러나는 그녀의 강단있는 모습은 결국 그녀 자신을 설명하기보다는 그녀가 지난한 역할 수행에 적격자임을 입증하는데 더 효력을 발휘한다. 아까 언급한 '써니'의 노출이 매력적인 반면 이상할 정도로 섹시하게 느껴지지 않는 까닭은 정윤희를 닮은 수애의 '청순한' 색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녀를 성적인 대상으로 바라보면서도 선을 넘어서지 않는 주변의 태도 때문이다. 남편을 찾아 온 지고지순한 아내라는 뒷배경은 이렇게 보이지 않는 힘을 발휘한다. 영화에서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가 바로 써니의 노래가 감도는 가운데 펼쳐지는 처절한 전투씬이다. 전쟁이 치열할수록 병사들을 위무하는 써니의 노래소리는 슬프도록 감미롭게 다가온다.
 여기서 순이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아내의 지위를 점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녀는 부부사이의 필요조건인 독점적 사랑 없이 텅 빈 아내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적당한 선에서) 모두의 아내가 될 수 있다. 순이가 시어머니를 대신하여 베트남으로 왔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그녀는 어머니의 자리까지 겸직한 셈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녀가 남편을 구하기 위해 미군에게 몸을 바치리라는 강한 암시가 담긴 장면에서 관객들이 느꼈을 충격이 어땠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을 거다.(여기에 대해 이준익 감독은 인터뷰에서 관객들이 클리셰에 갇혀 있는 것이라며 그걸 깨보고 싶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영화를 보고 그 강한 암시 이외의 다른 해석을 해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의 순이(써니)-아내-어머니가 그 험한 꼴을 당하는 동안, 물론 박상길 상병-남편-아들도 전쟁의 병사로서 수난을 겪는다. 이는 순이의 무모해 보였던 베트남행에 구원자로서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순이와 상길이 대면하는 장면은 영화 전체에서 두 번뿐이다. 고국의 군대에서 '나를 사랑하냐, 네가 사랑이 뭔지 아냐'며 순이에게 일갈에 가까운 물음을 던졌던 상길은 사회. 역사적인 방식으로 상당한 대가를 치르고 마침내 베트남으로 온 순이로부터 대답을 듣게 된다. 상길의 따귀를 올려붙이며 순이는 그 묵은 질문에 마침내 답을 한다. 순이의 몸짓은 정신 나간 사람을 깨우기 위해 철썩철썩 뺨을 때리는 것과 유사해 보인다. 그녀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받는 아내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전도된 방식으로 핵심의 공백을 메운다. 여기서는 상길의 질문 자체가 무의미해지고, 어리석어진다. 상길이 부르짖은 사랑은 오히려 그를 전쟁터로 내모는 결과를 초래했었다.(상길은 애인으로부터 온 편지 때문에 고참과 싸우게 되고, 이로 인해 베트남전에 참전하게 된다) '박상길 일병 구하기'는,  온전한 아내가 되기 위해 전쟁터를 위무하는 모나리자가 되는 방식의 우회로를 택해야 했던 순이의 손으로 이루어진다. 순이가 주인공이면서도 불투명해질 수밖에 없었던 건 그녀가 너무 바빴기 때문이다.

by 베리배드씽 | 2008/08/06 01:08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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